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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가 있는 산행/수도권55산(終)

[수도권55산2]<은고개-남한산(3)-청량산(4)-검단산(5)-망덕산(6)-이배재>

by 수헌! 2019.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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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55산2]<은고개-남한산(3)-청량산(4)-검단산(5)-망덕산(6)-이배재>


<청량산을 지나 성남 검단산 가는길>


언   제 : 2019.6.1(토)  맑음,연무

어디로 : 은고개-남한산(3)-벌봉-청량산(4)/수어장대-제1남옹성-검단산(5)-망덕산(6)-이배재

얼마나 : 산행거리 약 15.1km/산행시간 약 5시간 44분(식사및 휴식시간 포함)


산행기록

09:12  은고개/교차로 신문사 우측 들머리/산행시작

09:29  303.0봉/삼각점[판독불가]

09:32  엄미리계곡(0.41km)갈림길

09:44  송전탑(#84)

10:06  엄미리계곡(0.7km) 갈림길

10:28  한봉(1.1km),큰골(1.2km)갈림길/남한산성 외성 진입/우

10:30  남한산(522.0m) 정상/삼각점[422재설]/정상석

10:38  벌봉(512.2m)

10:42  벌봉앞 삼거리/상사창동(2km)갈림길/위례둘레길 합류/좌

10:51  봉암성문/동장대터/남한산성 본성 진입

11:19  402.0봉

11:25  북문

11:30  북장대터

11:40~12:02  서문/점심식사(22분)

12:12  청량산(497.1m)정상/수어장대

12:16  482.6봉/삼각점[판독불가]/서암문 위/탄천지맥(대한산경표) 능선 합류

12:22  영춘정

12:36  지화문(남문)

12:47  7암문/한양삼십리 누리길 안내도/남한산성을 내려와 도로따라 남쪽으로(독도주의지점)

12:53~13:22  제1남옹성/휴식(29분)

13:46  한양삼십리누리길 갈림길/좌측 지형도상 검단산 왕복후 우측 으로 갈예정

13:50  지형도상 검단산(523.9m)/헬기장 공터/재난통신 폐 군막사/검복리(2.03km)갈림길/되돌아섬

13:55  검단산 4거리/검단산(536.4m)은 군사,통신시설로 접근불가/좌측 9시 방향으로

13:58  헬기장(약 525m)/검단산 정상석

14:04  불당리,윗말 능선 분기점/우

14:19  두리봉 갈림길

14:23  망덕산(498.9m) 정상/쉼터/정상석/삼면봉(성남 중원,광주 중부,광주)/두리봉 능선 분기점

14:34  보통골(1.3km) 갈림길

14:56  이배재/육교/338번 도로(성남-광주)/버스정류장(31-2,31-3,500-5,3-3)/산행종료


가는길 사가정역-(2312번 버스)-명일역-(13번 버스)-은고개입구

오는길  이배재고개-(31-2번 버스)-모란역-(전철)-사가정역


수도권55산 2구간 산행 GPS실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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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도>


남한산성

....그렇다면 남한산성은 언제 처음 만들어졌을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인 672년(신라 문무왕 12), 신라는 둘레가 8㎞에 달하는 거대한 성을 쌓았다.

  당시 주장성(晝長城)으로 불렸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이 성을 남한산성으로 보고 있다.


주장성을 남한산성으로 보는 주된 근거로는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조선시대 지지자료에서 남한산성을 주장성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

 2000년 이후 실시된 남한산성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신라시대 축성 기법으로 쌓은 성벽과 곳곳에서 통일신라시대 토기편이 확인되었고,

  2004년에 남한산성 행궁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대형 건물지가 발견된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주장성의 축성 시점인 672년은 신라가 이미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해당한다.

 그리고 둘레 8㎞에 달하는 거대한 성을 쌓기 위해서는 연인원 300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신라가 많은 비용과 인력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감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당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대동강 이남지역의 땅을 신라에게 주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을 직접 지배하고자 했다.

 심지어 신라까지도 그들의 영토로 편입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이에 신라는 당과 국운을 건 전쟁을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주장성을 쌓았던 것이다.

주장성은 수십 만명이 에워싸고 공격하더라도 쉽게 함락시킬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였다.

672년 한강유역에 주장성이라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확보한 후,

 신라는 당나라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하여 결국 676년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남한산성은 역사적으로 매 시기마다 중요한 군사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조선시대에 대대적인 수축이 이루어지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의 수축 문제는 태종대부터 그 논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 수리나 수축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논의로만 그쳤던 남한산성의 수축 문제는 임진왜란 이후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천험의 요새이면서 한양에 인접해 있고,

 한양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단순히 여러 주요 산성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사시 왕실과 수도를 지켜줄 곳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선조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수축문제가 논의되었다.

 하지만 수축에 막대한 노동력과 비용 등이 소용될 것으로 예상되어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본격적인 수축은 인조대부터 이루어졌다.

반정으로 왕에 오른 인조는 외교정책을 친명배금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 외교정책의 전환은 후금(청)을 크게 자극하는 것이었고,

집권 초기에 군사문제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이괄의 난이 일어나면서 인조와 대신들은 공주로 피난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를 계기로 수도에서 가까운 남한산성의 수축이 중요한 현안으로 제기되어,

1624년부터 1626년까지 약 2년 4개월 동안 남한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수축이 단행되었다.


이후 남한산성은 전란을 겪으면서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어 계속해서 원성뿐 아니라 외성의 증개축도 이루어졌다.

 1638년 외성 남장대 옹성을 시작으로 1686년 봉암성, 1693년 한봉성, 1719년 신남성이 신축되었다.

이어 정조대인 1779년 다시 한번 대대적인 개축이 실시되었다.

 한편 남한산성은 한양을 보호하고 비상시 임금이 피난하여 머물 수 있는

임시수도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행궁과 관아를 비롯한 여러 시설들이 함께 건립되었다.

 특히 1625년에 시작하여 1626년에 완공된 것으로 알려진 행궁은 유사시를 대비한 일종의 예비궁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남한산성이 대대적으로 수축되자,

이를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수어청(守禦廳)이 설치되었다.

한편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수도방위의 중대성이 증대되자 요충지인 광주지역은 유수부(留守府)로 승격했다.

그리하여 남한산성은 수어사와 광주유수에 의해 이원적으로 관리되었다.

이후에도 남한산성의 관리 체계는 몇 차례 변화를 겪었다.


병자호란은 불과 2개월 여 만에 끝났지만,

 전쟁이 남긴 정신적·물질적 피해와 후유증은 임진왜란 못지않게 심각했다.

인조가 무릎을 꿇은 치욕을 겪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수십 만명의 포로들이 청군에게 붙잡혀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당시 후금과 형제관계의 화약을 맺은 조선은

여전히 ‘오랑캐에게는 결코 칭신(稱臣)할 수 없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청과 맺은 기존의 관계를 파기했다.

하지만 청군의 침략을 막아낼 구체적 방안이나 대책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척화파와 주화파 모두 청과의 향후 관계를 놓고 논쟁을 벌였지만,

 ‘유사시 강화도로 들어간다’는 것 외에는 뚜렷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이 1636년 청군은 전격적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때 직접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한 청 태종은 인조를 붙잡아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속전속결 전략을 구사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조선 조정과 인조는 최명길이 홍제원에서 청군 장수들을 만나 시간을 끄는 사이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신했다.


하지만 ‘천하의 요새’ 이었지만 확실히 ‘준비’되지 않았던 남한산성에서의 이후 농성 과정은 처참했다.

기대하던 원군과 근왕병이 청군에게 번번이 제압되었고,

일상적인 추위와 굶주림의 공포 앞에서 조선군의 저항 의지는 날로 약해졌다.

  반면 남한산성을 압박하는 청군의 전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 기간 동안 산성 주변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은 몇몇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큰 규모의 전투에서는 대부분 참패하고 말았다.

1636년 12월 28일 남한산성 북문 골짜기에서 벌어진 대규모의 접전에서 조선군은 수백 명의 정예병을 잃었으며,

 1637년 1월 3일 쌍령전투에서도 참패했다.

결국 조선은 청의 압박과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로 나아가 항복하고 말았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과 광주 주변의 백성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조정에 대한 접제(接濟) 때문에 시달렸던 것은 물론, 전쟁 자체로 인한 피해도 가장 혹심하게 입었다.

 죽거나 다치고, 수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갔다.

호란이 끝난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거나 떠도는 참상을 겪었다.

  이에 조정은 광주주민들에게 과거 응시의 기회를 주는 등 민심을 회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탄천지맥이란?

 

탄천지맥이란 한강과 한강의 지류인 탄천을 구분하는 수계 산줄기로,


할미산성이 있는 한남정맥 선장산(349.7m)에서 1.7km 지점인 향린동산 금호베스트빌리지 뒤 무명봉에서 북서쪽으로 분기하여

88컨트리클럽, 물푸레고개, 법화산(383.2m), 대치(43번국도), 불곡산, 태재(57번지방도), 영장산, 갈마치, 이배재,

 망덕산, 검단산(536.4m), 남한산성(청량산 497.1m), ()위례택지지구,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장지근린공원,

두댐이공원, 투구봉(개롱공원 59m), 성동구치소(62m), 웃말공원, 양재대로, 새싹어린이공원, 송파사거리, 석촌동고분군,

아시아공원, 잠실종합운동장을 지나 올림픽대로 청담교 아래의 탄천과 한강 합수점에서 끝나는 40.5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청량산 수어장대에서 북서쪽 능선으로 내려오면 위례택지지구부터는 낮은 산들이 도시개발로 사라져서 산줄기를 찾기가 어렵고,

송파사거리부터 합수점까지는 오랜기간에 걸쳐서 한강과 탄천의 토사가 퇴적되고

한강의 유로가 변경되면서 형성된 지형으로 산줄기를 찾는다는 것이 무의미하기는 하나 탄천과 한강 수계를 구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녹색선:대한산경표 탄천지맥  /   적색선:신산경표 검단지맥>


*검단산(성남)은 3곳 이더라




수도권55산 두번째 이야기다.

오늘도 절친인 직진 기운이와 수도권 55산을 이어간다.

셋이 같이 다니다 둘이 다니려하니 조금 어색하다.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고...빠른 시일내에 합류하기를 바래본다.

 

살짝 더운듯한 날씨지만 녹음 가득한 숲길은 걷기에 그만이다.

미세먼지와 연무 오존도 숲속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한산성은 대대적인 보수중이라 분위기가 조금 깨지만

그래도 후대를 위해 잘 보존되고 관리되어야겠다.


남한산성 남문을 지나 7암문에서 도로따라 빠져나와야 하는데 요주의 지점이다.

10년전 검단지맥의 이름으로 혼자 걸을때 살짝 지나쳐간 기억이 있는데

우리의 직진 기운이는 또 직진했다.

덕분에  제1남옹성에 올라 막걸리 한잔 마시며 길게 휴식도 가져본다.


성남 검단산은 사실상 3개이다.

공군부대가 자리한 실제 검단산 정상은 출입금지이고

지형도상 검단산은 위치를 변경하여 523.9봉에 표기되어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국립지리정보원에서 오기를 수정해야할것이다.

차라리 헬기장에 정상석은 정상을 못가기때문이라 이해가 간다.


망덕산에 오르면 오늘산행은 막바지이다.

2년전 추운 겨울날 친구와 둘이서 망덕산에서 두리봉으로 걸었는데 괜찮았던 기억이 난다.


이배재에서 산행을 종료하고 버스타고 전철타고 집으로...

2% 부족하다...무얼까...


 은고개입구 하차

 우측에 들머리

 들머리

 303.0봉

 1구간때 걸은 산줄기...좌측 검단산 우측 용마산


 남한산성 외성 진입

 세월속에


 예전에 없던 정상석


 인증샷

 지난구간에 걸은 산줄기를 바라보고

 어쪄면 방치가 최소한의 보전일수도...

 벌봉 도착

 벌봉에서 조망 남쪽...성남 검단산

 서쪽...남한선성 본성과 청량산 정상

 하남 검단산부터 용마산까지

 벌봉을 내려서서


 


 성남 검단산 뒤로 두리봉과 망덕산

 남한산성 본성과 동장대지



금암산 이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고골



찔래꽃


 북문


 서문

 한창 보수공사중


 탄천지맥 산줄기

 행락객들이 많고


 청량산 정상...수어장대

 482.6봉 삼각점

 가야할 성남 검단산


 남문


 7암문에 내려서서 도로따라


7암문

제1남옹성에서 바라본 남한산성 

제1남옹성

 요새


 직진한 친구를 기다리며

 남옹성 내부 방어 요새


 도로와 산길을 번갈아


 지뢰지대

 좌측으로

 지형도상 검단산

 폐 군 막사

 검단산 군부대에서 접근금지 방송이 울리고...좌측으로

 헬기장에 검단산을 대신하여


 편안한 산책로

예전에 불당리에서 능선타고 온 기억이


 망덕산 정상



이배재...육교가 새로 생겼고

 이배재

산행을 마치다

남한산동-벌봉봉암-남한산서-청량산-망덕산_20190601_091307(episoder-20190601_145738).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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