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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終)/백두대간이란 ?

[이용대의 등산칼럼] 백두대간이란 무엇인가(월간 마운틴 자료)

by 수헌! 2014.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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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白頭大幹)은 우리 국민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온 산줄기다.

하지만 지금의 백두대간은 우리만의 산줄기가 아니다.

지난해에는 외국인이 종주를 끝내고 <백두대간 트레일 BAEKDU DAEGAN TRAIL>(ROGER SHEPHERD. 2010)이란 영문판 종주기를 펴낼 만치 유명해졌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판 애팔래치아트레일이 백두대간이라고 표현했으며 우리 산의 아름다움을 극찬했다.

이제 백두대간은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는 산줄기가 됐다.

백두대간이라는 보통명사는 전 국민적 관심과 열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종주를 하고 있으며

등산에 무관심한 사람들까지도 그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가 되었다.

↑ 백두대간의 실체를 명백히 해준 책들. 조석필의 <태백산맥은 없다> <산경표를 위하여>, 박용수의 <산경표 영인본>, 남난희의 <사랑해서 함께 한 백두대간> <하얀 능선에 서면>, 박성태의 <신산경표>, 이우형이 복간한 <대동여지도>


그렇다면 이토록 유명해진 백두대간이란 무엇인가.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등줄기를 이어주는 큰 산줄기 이름이며 전통적인 지리개념이다.

북쪽의 백두산(2750m)에서 남쪽의 지리산(1915m)까지 남북을 관류하며 큰 획을 긋는,

도상거리 1,625km의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산줄기다.

그러나 백두대간이라는 산줄기 명칭이 전래된 역사적 배경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백두대간의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하려면 우리 고유의 지리개념서인 <산경표(山經表)>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백두대간은 조선조 후기 1769년에 발간된 지리서 <산경표>에서 그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우리나라는 사람뿐만 아니라 산에도 족보(族譜)가 있다.

이 산족보가 곧 <산경표>다. 이 책은 일종의 지리부도와 유사한 책으로

우리나라의 산줄기와 강줄기 명칭을 모두 포함한 지형에 관한 총체적인 정보를 수록한 책이며,

우리나라 산줄기와 갈래를 알기 쉽도록 만든 지리서이다. 산경(山經)은 산의 흐름을 뜻하며,

우리나라의 산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로 흐르다가 어디에서 끝나는지를 족보기술식의 도표(圖表)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산경을 바탕으로 거리(里數)를 부기해서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광문회본>(1913년 영인본 간행)의 <산경표>에서 다음과 같은 해제를 실었다.

"산경만이 산의 줄기(幹)와 갈래(派)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돌며 사람 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고 밝혔다.

<산경표>는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15개로 분류하고 있다.

1대간(大幹), 1정간(正幹), 13정맥(正脈)에다 다시 가지 쳐 뻗은 기맥(岐脈)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는 조선조 때 공인된 우리나라 산맥 이름으로,

우리가 일제식민지시대부터 지금까지 교육받아왔던 태백산맥이니 소백산맥이니 하는 산맥개념과는 전혀 다른 체계다.

그동안 애써 배워온 산맥체계는 1903년 일본의 지리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가 발표한 지질학 연구논문 <조선의 산악론>에 토대를 두고,

야스쇼에이(失洋昌永)라는 일인학자가 집필한 <한국지리>라는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 교과서는 고토분지로의 이론을 검증 없이 그대로 채용한 것이다.

이것은 산맥이 실제 지형의 파악을 목적으로 하는 지리개념이 아닌,

땅속의 맥줄기인 지질구조선을 산맥의 기본개념으로 한 것이다.

태백산맥, 소백산맥, 차령산맥 등의 이름이 여기에 해당한다.

백두대간과 태백산맥이라는 두 체계는, 전자는 땅위지형의 개념이고 후자는 땅속지질의 개념이다.

일제가 식민지 지하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우리의 산줄기 개념을 지질의 개념으로 왜곡시키자,

이를 우려한 육당 최남선이 자신이 설립한 조선광문회에서 우리 산줄기 갈래와 이름을 바로잡기 위한 민족적 저항의식에서

대중계도를 위해 <산경표> 영인본을 발간했지만 사람들에게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이후 조국광복과 분단, 한국전쟁 등 격변기를 거치는 동안 백두대간이란 이름은 오랜 세월동안 묻혀 버렸다.

↑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내용. 우리나라의 산경을 족보기술식의 도표로 표현했다.


우리 고유의 산줄기 개념이 전래되지 않은 채 망각된 산줄기로 사라져 버린 것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 원인이었다.

현재 우리가 배워온 산맥 이름인 장백, 마천령, 노령, 태백산맥 등은 일본지리학자가

일반상식의 산맥과는 달리 지질구조선 즉, 땅속의 맥 줄기를 산맥의 기본개념으로 한 것이다.

산맥이라는 개념자체가 땅위의 어떤 선상(線上)을 기준하지 않고

땅속의 구조선을 기준으로 하여 거기에 땅위의 산들을 억지로 꿰맞춰 놓은 분류체계다.

그 결과 땅위의 산줄기에 상관없이 지질구조선대로 따라 그려진 산맥에는

물길이 포함되고 산맥이 강을 건너는 말도 안 되는 모순을 낳기도 한다.

산경표 원리의 시작이요 끝이라 할 수 있는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리와도 사뭇 어긋나는 체계다.

백두대간이라는 개념이 우리 곁에 다가온 것은 불과 30년 전의 일이다.

1980년 이우형이란 고지도 연구가에 의해 <산경표>가 발견되면서부터 대간(大幹), 정간(正幹), 정맥(正脈)의 개념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1986년 언론매체로는 처음으로 한국일보사가 출간한 월간지 <스포츠레저>에 백두대간이라는 말이 처음 실렸다.

'국토대장정 고산자의 발길을 따라 산맥을 간다'라는 제호의 연재물 태백산맥 편에서

이우형의 권고로 백두대간이란 제목을 붙이면서 이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우형은 한 때 코오롱등산학교와 한국등산학교 등에서 독도법 강의를 맡아 등산교육에 참여해왔고,

서울시산악연맹 초대 구조대장을 맡아 활동한 산악인이다.

그는 변화무쌍한 삶을 살다간 사람이기도 하다.

기독교방송국 성우1기생으로 방송과 인연을 맺기도 했으며, 1969년 한국최초의 산악전문지 월간 <산수>를 창간한 장본인이다.

그가 지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잡지에 실릴 등산지도의 편집이 동기가 되었다.

등산지도집 <산으로 가는 길> <종합 제주도 총도>와 같은 지도첩을 제작 보급했다.

그러나 지도에 쏟았던 열정 때문에 형무소에 갇히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가 만든 제주도 지도가 국립지리원의 복제승인 없이 제작되었다하여 고발당한 것이다.

지도와 옥고는 그에게 '현대판 김정호'라는 별명을 선물했다.

그가 고지도 연구에 몰입하게 된 동기는 어느 날 지리학과 졸업반 대학생 몇 명이 그의 사무실에 찾아와 "선생님! 고지도를 연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명색이 지리학과 졸업반인데 <대동여지도>를 한 번도 보지 못 했습니다"라는 말 때문이었다.

그게 현실이라는데 자극을 받은 그는 대동여지도를 연구하게 되었고,

그 후 1985년 고산자의 <대동여지도>를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사 광우당(匡祐堂)에서 복원,

해설서 <대동여지도의 독도>와 함께 보급하여 지리학계의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백두대간이란 말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 단어는 너무나 낯선 것이었다.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오던 우리 고유의 산줄기 이름이라는 사실이 친숙하게 다가오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이후 월간 <사람과 산>이 우리 고유지리개념의 정립과 구명을 위한 '우리 산줄기 되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1990년부터 6년 동안 1대간(大幹) 5개 정맥(正脈)을 답파하며,

백두대간 종주라는 새로운 산행 스타일과 국토종주 붐을 조성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남난희의 국토종주기 <하얀 능선에 서면>(1990년 수문출판사)이 발간되었다.

이 책은 1990년에 출간되었지만 실제의 내용은 1984년의 기록으로,

겨울철에 여자 혼자의 몸으로 기나긴 국토의 등뼈를 종주했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당시 남난희가 종주했던 산줄기는 엄밀하게 말하면 지금의 백두대간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금정산에서 출발하여 신불산 가지산 주왕산 백암산 통고산으로 연결된 낙동정맥을 타고 오르다가 태백산에서부터 백두대간과 합류한 종주였다.

이 때만해도 백두대간에 대한 일반인식이 무르익지 않던 시기였다.

그러나 겨울철 산줄기를 타고 여자 혼자서 가슴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헤치며 국토의 남북을 종단했다는 사실 자체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화제의 중심에 섰고 중판을 내면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섰다.

마침 백두대간 열풍과 맞물려 대간 정간 정맥 등 국토종주 붐을 일으키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통일이 되는 그날, 나는 다시 배낭을 메고 나설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나는 국토의 맥과 얼을 찾아 당당히 나설 수 있으리라.'

남난희의 <하얀 능선에 서면>의 머리글에 남겨진 글이다.

그러나 휴전선 너머 북녘의 마루금을 연결한다는 그녀의 소망은 현실적으로 점차 요원해지고 있다.

중년의 아줌마가 된 지금, 그는 다시 배낭을 메고 사춘기 아들과 함께 처녀시절에 홀로 걸었던 능선 위에 다시 올랐다.

금년에 발간한 <사랑해서 함께한 백두대간>(2011년 수문출판사)서문에서

'내가 백두대간이고 백두대간이 나입니다'라고 밝힌 것처럼 그녀에게 백두대간은 숙명적인 산줄기다.

한국에서 백두대간을 단독으로 종주하고 최초로 책을 펴낸 사람은 27세 처녀 남난희다.

그로부터 26년 후에 그녀는 53세의 아줌마가 되어 처녀시절에 홀로 걸었던 대간의 등뼈를 아들과 함께 또 한 번 해냈다.

처음에는 76일 동안 한겨울의 하얀 능선을 뚫고 홀로 외로움과 싸우며 걸어간 긴 여정이었지만, 아들과 함께한 두 달 동안의 종주는 벅찬 감격이었다.

2009년 9월 그녀는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것도 장장 690km의 긴 거리를, 47일 동안 두 모자는 산에서 뜨는 해를 봤고, 산으로 지는 해를 보며 걷고 또 걸었다.

밤이면 총총히 박힌 별빛을 보고 산짐승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

천막을 치고 밥을 하고 식수를 찾아 골짜기를 뒤지고 매일 같은 일이 반복되는 산중생활 속에서 가끔은 사소한 의견충돌로 모자가 마음을 상하기도 했다.

때로는 산길 한가운데로 돌진해오는 뱀과 마주치기도 했고,

불과 십여 미터의 근접거리를 두고 산돼지 무리와 마주치는 급박한 상황을 맞아 마주 노려보며 기싸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26년 전 야생을 간직했던 험난한 산길에는 인공축조물이 놓이고, 자연미가 훼손된 현장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그 머나먼 여정 속에서 두 모자는 사랑을 확인했고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어머니가 되었다.

종주가 끝난 뒤 16세 사춘기 소년은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했고, 남난희는 갱년기 아줌마로 변모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번 더 되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다.

무어라 해도 백두대간의 실체를 명백히 해준 책은 1769년 조선조 때 만들어진 <산경표>다.

또한 대중계도의 목적으로 육당이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영인본을 발간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고유의 지리개념은 역사의 무덤 속에 파묻혀 버렸을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질곡의 삶을 살면서 국학의 터를 닦고 길을 내면서 조선의 불씨를 되살린 최남선의 업적 또한 높이 평가해야한다.

또한 1980년대에 이르러 이우형이 <산경표>의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우리의 고지리개념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大東輿地圖의 讀圖>(1990년)라는 해설서와 <大東輿地圖>를 복간하여 우리의 옛 지리개념을 알리는 일에 진력했다.

남난희의 <하얀 능선에 서면>이 백두대간 종주의 기폭제 구실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 책은 남난희 개인의 일기형식 산행기록이다.

백두대간을 실제로 답파하며 학술적 영역으로 접근 발전시킨 공로는

조석필의 역작<산경표를 위하여>(1993년 산악문화사)와 <태백산맥은 없다>(1997년 사람과 산)이다.

그는 이 저서 집필을 위하여 천직인 소아과병원도 잠시 접은 채 집필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의 노고에 기립박수라도 보내주어야 하겠다.

또한 간단한 해설과 함께 조선광문회본 <산경표>(1990년 푸른산)를 영인본으로 출간한

소설가 박용수도 백두대간의 이해를 높이는데 한몫을 담당했던 사람이다.

도상거리 3,800km의 국내 산줄기를 10년 동안 일일이 답파하며 발품의 결과를 정리한

<신산경표>(2004년 조선일보)의 저자 박성태 또한 백두대간의 실체를 알리는데 공헌한 사람이다.

금강산 관광조차 자유롭지 못한 현실 속에서 남북백두대간 잇기의 꿈을 실현한다는 것은 헛된 망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 꿈이 실현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저버릴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숙명이다.

한반도 통일이 오는 그날, 휴전선 너머 북녘 땅 935km의 마루금을 있는 '통일대간 종주'를 꿈꾸는 것은 우리국민 모두의 바람이기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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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4.15 미디어 다음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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